대놓고 한글 내세워... 인도네시아의 한국 라면 전성시대
한국인들이 인도네시아에 대거 밀려들기 시작하던 1980년대와 1990년대 당시에도 현지 시장에 넘쳐나던 라면 중 우리 입맛에 가장 맞는 것을 꼽으라면 누구나 인도푸드(Indofood)의 인도미(Indomie), 그중에서도 '양파 닭고기 맛(Rasa Ayam Bawang)'을 추천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인도미는 수많은 라면 브랜드들 중에서 부동의 인도네시아 1위를 차지하고 있다. 그냥 1위가 아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빅 3 브랜드인 인도미, 수퍼미(Supermi), 사리미(Sarimi)가 전체 라면 시장의 81%를 점유하고 있는데 그중 인도미는 홀로 72%의 압도적인 점유율을 자랑하고 있다. 그 매출에 우리 교민들도 분명히 한몫했다.
인도네시아 라면의 특징은 대부분 닭고기 베이스의 흰색이 감도는 말간 국물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2011년 KBS <남자의 자격> 프로그램에서 이경규가 개발해 팔도에서 상품화한 '꼬꼬면'이 현지의 한국 슈퍼마켓에 풀린 것을 맛본 교민들은 누구나 꼬꼬면이 인도네시아 라면, 특히 인도미의 '양파 닭고기 맛'을 벤치마킹한 것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았다. 말하자면 인도네시아 라면의 맛이 한국에 진출한 것인데 그때는 아무도 이를 대놓고 언급하지 않았다.
< 인도미 '양파 닭고기 맛' - 출처: 인도미(Indomie) 홈페이지 >
인도네시아가 명실상부 라면 왕국이 된 것은 예전부터 발달한 현지 국수문화에 태평양전쟁 이후 경제적으로 인도네시아를 장악하던 일본의 인스턴트 라면이 촉매제가 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현재 수많은 현지 라면들 속에서 일본의 니신(Nissin) 브랜드가 지금도 두각을 나타내고 있고 그간 많은 인도네시아 기업이 일본 라면을 벤치마킹했다.
그러다가 인도네시아 라면 애호가들이 한국 라면에 마음을 주기 시작한 것은 2010년대 후반 한국 식품유통 업체를 통해 제한적으로 들어오던 삼양식품의 '붉닭볶음면'이 현지 시장에 핵폭탄급 호응을 일으키면서부터다. 이후 '불닭볶음면'은 오지의 슈퍼마켓에 가도 찾아볼 수 있게 될 정도로 큰 인기를 끌었다. '불닭볶음면'을 제대로 읽거나 발음할 길이 없었던 인도네시아인들 사이에 이 라면은 지금도 '삼양'이라는 대명사로 불려 이곳에서 삼양식품의 인지도를 제고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 라면의 탈을 쓴 인도네시아 라면이 속속 나오기 시작하더니 이젠 현지 라면 시장을 선도하는 인도미가 무려 뉴진스를 광고 전면에 내세워 신상품 '한국라면'을 출시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한국 라면인 듯한 뉘앙스를 풍기던 타 브랜드의 마케팅 방식을 따르지 않고 대놓고 '인도푸드가 만든 한국 라면'이라며 정체성을 분명히 했다.
< 인도미의 '한국라면'을 광고하는 뉴진스 - 출처: 인도미(Indomie) 홈페이지 >
실제로 맛본 인도미의 국물 베이스 파란색 포장의 '한국라면'은 누가 말해주지 않으면 인도네시아산이라고 느끼지 못할 정도로 한국 라면의 풍미를 그대로 풍겼다. 단지 인도네시아인들이 한국 라면에서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된 특유의 매운맛이 일반 한국 라면의 3-4배 정도 증폭돼 있다. '한국라면'은 국물 라면 말고도 빨간색 포장의 매운 치킨맛 볶음라면, 분홍색 포장의 K-로제 볶음라면 등 총 세 종류로 출시됐다. 포장지에는 한글이 선명하다. 심지어 국물 라면은 국물도 신라면급 빨간색을 띤다.
< 미스답의 '한국양념닭갈비맛 볶음면' - 출처: 인도마렛 홈페이지 >
사실 한글이 기재된 포장지를 사용한 현지 라면은 인도미의 이번 '한국라면'이 처음이 아니다. 2021년에 출시된 미스답(Mie Sedaap)의 '한국양념닭갈비맛 볶음면'도 한글 표기를 담고 있었다. 그런데 2020년 자카르타 타마(PT. Jakarta Tama)에서 내놓은 콤포트 푸드(Comford Food) 브랜드의 '아리랑(Arirang) 라면'이 그보다 좀 더 빨랐다. 외관만 봐서는 현지 교민들도 한국에서 수입한 브랜드로 착각하는 '아리랑 라면'은 매년 그 종류를 더해 이젠 슈퍼마켓 라면 코너의 한 매대를 완전히 차지할 정도로 다양해졌다.
< 현지 슈퍼마켓 매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아리랑 라면' - 출처: 통신원 촬영 >
한국인도 속을 정도이니 인도네시아 사람이 '아리랑 라면'을 한국에서 수입한 라면이라 생각하게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저렇게 많은 종류의 '아리랑 라면'이 쌓여 있는 것을 보면 도저히 현지 로컬 제품이란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다. 물론 포장지를 잘 들여다보면 현지 생산회사가 착실히 기재돼 있다. '아리랑 라면'은 실제로 대부분 한국의 라면들과 비슷한 맛이고 '매운 김치 국수', '사골 국수', '맛있는 닭고기', '인삼 닭고기 국수', '비빔면' 등 여러 선택지를 출시했다.
최근엔 마마수카(MamaSuka) 브랜드에서도 포장지에 한글을 넣은 라면을 선보였다. 상품명은 '미 핫 라바(Mie Hot Lava; 뜨거운 용암 라면)'이지만 그 옆에 '한국 매운 라면'이란 표기가 돼 있다. 분홍색 포장은 불닭 매운맛, 노란색 포장은 매운 치즈맛이다.
< 마마수카(MamaSuka) 브랜드의 '미 핫 라바(Mie Hot Lava)' - 출처: 통신원 촬영 >
인도미의 '한국라면'은 분명한 정체성 광고로 당연히 현지 라면 매대에 올라와 있는 반면 '아리랑 라면'과 마마수카의 '미 핫 라바'는 매장에 따라 한국 수입식품 코너에 버젓이 진열돼 있는 경우도 발견된다.
< 한국 수입식품 코너에 쌓여 있는 '아리랑 라면'과 마마수카의 '미 핫 라바' - 출처: 통신원 촬영 >
인도네시아 기업들이 앞다퉈 한글 표기를 넣은 상품들이 현지 상점에 넘쳐나는 것은 한국 소프트파워가 음식에서도 맹위를 떨치고 있다는 증거이므로 한국 라면이 잔뜩 쌓인 매대 앞을 지날 때마다 새삼 자부심이 차오른다.
사진출처 및 참고자료
- 통신원 촬영
- 《한인포스트》 (2023. 2. 5). 인도네시아의 자랑 ‘인도미’, https://haninpost.com/archives/66640
- 인도미 홈페이지, https://www.indomie.co.id/Product/Category/2
- 인도마렛 홈페이지, https://www.klikindomaret.com/product/mie-instant-goreng-6
성명 : 배동선[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인도네시아/자카르타 통신원]
약력 : 작가, 번역가 저서 『수카르노와 인도네시아 현대사』, 『막스 하벨라르』 공동번역, 『판데르베익호의 침몰』 번역